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얀 후스 (문단 편집) == 체코 내셔널리즘의 발흥과 부활 == 이후 1526년 [[보헤미아 왕국]]은 [[오스트리아 대공국]]을 통치하던 [[합스부르크 가문]]의 [[합스부르크 제국|영지]]가 된다. 초창기 [[페르디난트 1세]]와 [[막시밀리안 2세]]는 보헤미아인의 신앙을 보장해주었으나 [[루돌프 2세]], [[마티아스(신성 로마 제국)|마티아스]] 등을 거치며 신앙의 자유는 점차 위협받기 시작했고, 결국 [[30년 전쟁]]에서 팔츠 선제후 [[프리드리히 5세]]를 선출했다가 [[페르디난트 2세]]의 분노를 사 수백 년간 누리던 자치를 박탈당하고 보헤미아 왕국 왕위 후보자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만 출마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뀌었다.[* 나중에 [[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]]이 발발하면서 [[바이에른 선제후국|바이에른]] [[선제후]] [[카를 7세|카를 알브레히트]]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하면서 반기를 들었으나 오래 가지 못했고 [[마리아 테레지아]]가 보헤미아 여왕으로 즉위했다.] 이후 보헤미아 왕국의 재정적·정치적 주도권은 [[독일인]] 혹은 독일계 체코인이 장악했고 체코 고유의 문화는 쇠퇴했다. 여기에 [[30년 전쟁]]으로 인구까지 300만 명에서 80만 명으로 극감하면서 [[체코/역사|체코 역사]]의 암흑기가 도래했으며, 이전까지 [[합스부르크 제국]]에서 [[오스트리아 대공국]] 다음이었던 보헤미아 왕국의 입지도 점차 [[헝가리 왕국]]에게 밀리기 시작했다. 후대의 독일인 학자 [[프리드리히 엥겔스]]는 [[체코인]]을 "역사를 가지지 못한 국민들"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. 그러나 19세기 중반 [[민족주의]]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체코인들은 자신들이 단순히 [[오스트리아 제국]]의 일부가 아닌 독립된 [[체코/역사|역사]]와 문화를 가진 국민임을 증명하고자 했으며, 이에 따라 체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역사 인물로 얀 후스가 주목받기 시작하였다. 그리하여 얀 후스는 '외세의 억압에 맞서 체코인을 수호하고자 한 영웅'으로 부활하게 되었다. [[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]]의 해체 직후 [[체코슬로바키아]]에서 후스파 교회는 완전한 [[종교의 자유]]를 인정받았고, '체코 복음주의 형제단(ČCE)'이란 이름의 칼뱅 파-루터 파 연합교단으로 이어졌다. 이와 별개로 [[가톨릭]]에서 이탈한 체코 내셔널리즘 성향의 성직자들이 '[[체코슬로바키아]] 후스파 교회'라는 교단을 만들기도 했다. 20세기 격동과 혼란의 현대사를 거치며 비록 후스파를 믿는 인구는 극소수로 전락했지만, 여전히 대다수 체코인은 얀 후스를 국가 영웅으로 존경하고 있으며, 같은 맥락에서 후스파 교회들도[* 다만 대다수가 상기한 [[요제프 2세]]의 관용 칙령 이후, 혹은 [[체코슬로바키아]] 제1공화국 시기에 지어진 교회들이다.] 역사적 상징성을 인정받아 근대 문화 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. 현대 [[체코 공화국]]의 표어인 '진실이 승리한다(Pravda vítězí)'도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초대 대통령인 [[토마시 마사리크]](Tomáš Masaryk)가 후스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유언 중 하나를 따와 만들었다. 2005년 체스카 텔레비전의 가장 위대한 체코 인 설문조사에서 7위에 올랐고, 2015년 체코 라디오 공사의 설문조사에서는 1위에 올랐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